블로그 이미지
Sinya

Notice

Recent Post

Recent Comment

Archive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total
  • today
  • yesterday
2009. 10. 23. 00:34 도서


The Great Gatsby
Francis Scott Fitzgerald
1925년에 쓰여진 작품.
소담출판사 미니북으로 읽다. 2003년 초판 1쇄본.


 이 작품이 명작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피츠제럴드라는 이름은 무척 익숙하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말도 익숙해. 명작 소설들과 그다지 친하지 않은 내가 익숙할 정도라면 '정말' 명작이기 때문일텐데. 나는 이 책을 읽고 이틀을 고민했더랬다.
 그저 평범하고 아무렇지 않아보이는 이야기였다. 어쩌다가 이웃집 부자를 알게 되고, 그가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만남을 주선하고. 그리고 사고가 나고, 남자는 죽는다. 파티의 내용에 딱히 품위가 있는 것도 아니야, 화자에게 무언가 특별한 일이 일어난 것도 아니야. 그렇다면 왜?
 -시시해. 이런 게 왜 명작인 지 모르겠어.
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몸을 바친 시연으로 인해 알게 되었다. 이 통속적으로까지 보이는 소설이 아직까지 읽히는 이유에 대해서. 개츠비가 왜 위대한 지에 대해서. 그는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여 노력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었다. 그 꿈이 허구였을 지라도, 그 꿈이 그를 기만했을 지라도.
 사정을 아는 사람의 눈으로 보자면 너무나 바보같고 어이없을 정도로 그는 꿈을 따라 행동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꿈이, 다른 특별한 재능을 가져야 품을 수 있는 꿈이 아니라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감정인 '사랑'이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만큼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재능이다. 이 재능조차 없는 가여운 사람들이 세상엔 얼마나 많은가.)

 데이지는 냉정하게 그를 떠났지만, 그래도 데이지보다 개츠비가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데이지는 평생을 살아도 개츠비와 함께였을 때보다 행복해지지 못할거야. 그렇지만 개츠비는 최고로 행복해하며 죽었지. 물론 난 개츠비처럼도, 데이지처럼도 살고싶지 않지만, 굳이 둘 중에 선택하라면 데이지 쪽을 선택하겠지만은, 그래도 난 개츠비가 위대했다고 인정한다. 그는 부러움 받아 마땅하고, 찬사받아야 할 사람이다.
posted by Sinya
2009. 10. 22. 01:05 영화

9/21 관람. 무려 한 달만에 키보드 앞에 앉다.
정기훈 감독.(데뷔작이라고 한다.)
최강희(애자 역), 김영애(엄마 역)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원래부터 애증관계인 거라고 생각한다. 좋은 행동과 좋은 말만 나오기는 힘든,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퉁명스런 말과 행동이 주가 되기도 하는 관계. 그러나 극한 상황이 오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애정만 남는 모양이다. 빨리 떨어져 있고 싶어하던 관계에서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어하는 관계로 돌변한다.
 나는 예전부터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지에 대해 궁금했다. 왜 소중한 것을 항상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것일까? 대구 지하철 참사 때 휴대폰에 남겨진 어머니의 메시지-라고 한참 떠돌던 글이 있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잃고 난 뒤의 후회같은 것.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엄마를 부탁해」도 그런 종류였다. 이것은 기억의 작용인가? 고3 시절이 힘들었지만 좋았던 시절로 남는 것처럼,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모두 있었지만 일시적인 나쁜 일의 기억은 기억 저켠으로 사라져 버리고 좋은 일의 여운만 남는 것일까? '있을 때 잘해.' 라는 명제에는 별로 공감하지 못한다. 성가신 일은 성가신 것이고, 귀찮은 건 귀찮은 것이다. 그렇지만, '성가셔도 귀찮아도 가끔은 극복해서 친절한 일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잘 해드릴걸' 하는 후회가 남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보통인 것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정말 기억의 어떤 작용 때문일까.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는 것은 참 이상한 것이다. 언뜻 부모가 자식에게 퍼주는 상황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여러 매체들, 그러나 '부족하게 받은' 자식이 부모에게 헌신하는 것은 왜일까? '받던 놈은 받을 줄밖에 모르'는데, '못받던 놈이 효도하는' 것은 단순히 어릴 적 받지 못한 사랑을 나중에라도 받고 싶어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대상에 대한 감정이 복잡하였기 때문에 극적이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왜 나는 차별받았는가에 대해 다각도로 고민해본 자만이 내릴 수 있는 결론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애자는 무언가 결핍한(된, 이 아니라) 상태에서- 어머니의 죽음으로 그것을 메꾸어 냈다. 그녀는 얻은 것이 있었다. 나는, 병간호를 하지 않는 한이 있을지언정, 친인의 죽음으로는 아무 것도 메꾸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굳모닝 프레지던트, 2009>>  (0) 2009.11.15
<<로나의 침묵 Le Silence de Lorna(2008)>>  (0) 2009.11.06
<호우시절, 2009>  (0) 2009.10.21
<<9(Nine), 2009>>  (0) 2009.10.10
<<드림 업, 2009>>  (0) 2009.09.13
posted by Sinya
2009. 10. 21. 03:43 연습

 작다. 그녀는 생각했다. 거구의 사내를 상상했던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170 중반 가량의 갸름한 얼굴을 가진 약간은 호리호리한 몸매의 사내를 기대했었다.
 "전화했던 분이 맞으신가요?"
 동글동글한 얼굴로 다시 시선을 돌린다. 
 "네. 안녕하세요."
 예의바르게 웃어보인다. 상대방도 예의상의 미소를 보내온다. 약간 큰 코였다. 보통의 코보다 크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보다 조금 더 컸다. 큰 얼굴에 비례하는 정도보다 조금 더 큰 코다. 얼굴 크기가 보통의 세 배는 되어야 어울릴만한 코의 크기다,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옆으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 위로도 적절히 올라온 코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짧게 자른 머리는 단정했고, 자잘한 주름이 잡히지 않은 깔끔한 와이셔츠를 입고 있었으나,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차를 몰고 온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운전용 운동화를 그냥 신고 내려버린 것일까. 
 "저 쪽에 식사할 만한 곳이 있어요. 가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운전 중 구두나 슬리퍼는 둘 다 마찬가지로 불편한 신발이다. 그녀는 운전석 아래 놓여 있을지도 모르는 구두를 상상했다. 걸음걸이를 볼 때 바깥쪽 굽이 안쪽보다 미세한 각도로 더 닳아있을 것이다.
posted by Sinya